충북의 독립운동가-권병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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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민은숙 | 등록일 | 10.11.01 | 조회수 | 366 |
권병덕(權秉悳)에 대하여1867년(고종 4)∼1944년. 독립운동가·천도교인.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본관은 안동. 호는 청암(淸菴)·정암(貞菴)·우운(又雲). 충청북도 청원 출신.
18세에 동학교인이 되었다. 1894년 동학운동 때 손병희(孫秉熙)와 함께 6만명의 교도를 이끌고 호응했으나, 관군에 의하여 진압당한 뒤 전국 각지를 방랑하였다. 1908년 일본에서 귀국한 손병희가 천도교를 일으키자, 여기에 입교하여 천도교의 전제관장(典制觀長)·이문관장대리(理文觀長代理)·금융관장(金融觀長)·보문관장(普文館長) 등을 역임하였다. 1919년 2월 25일경 천도교의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참배를 위하여 상경하여 손병희·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을 만나, 3·1운동 계획을 듣고 이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동의하였다. 그달 27일에 최린(崔麟)·오세창·임예환(林禮煥)·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煥)·홍병기(洪秉箕)·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默) 등과 함께 김상규(金相奎)의 집에 모여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였으며, 이들과 함께 민족대표로서 성명을 열기하고 날인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에는 민족대표 33인으로 서명한 사람 중에서 29인이 모였는데, 이때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는 만세삼창을 외치고 일본경찰에 자진하여 붙잡혀 2년 동안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천도교 종리원(宗理院)의 서무과 주임을 거쳐, 중앙교회 심계원장·감사원장·선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조선총사 朝鮮總史》·《이조전란사 李朝戰亂史》·《궁중비사 宮中秘史》 등이 있다. 1962년에 건국훈장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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