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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의 독립운동가-신채호
작성자 민은숙 등록일 10.11.01 조회수 450

청원의 독립운동가, 신채호 : http://navercast.naver.com/peoplehistory/koreanhistory/3536

 

신채호(申采浩)에 대하여
1880년(고종 17)∼1936년. 한말·일제강점기의 역사가·언론인·독립운동가. 본관은 고령(高靈). 호는 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 혹은 단재(丹齋). 필명은 금협산인(錦頰山人)·무애생(無涯生)·열혈생(熱血生)·한놈·검심(劍心)·적심(赤心)·연시몽인(燕市夢人), 가명은 유맹원(劉孟源).
1. 가계와 수업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에서 출생하였고, 충청북도 청원에서 성장하였다. 신숙주(申叔舟)의 후예로 아버지는 광식(光植)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을 지낸 할아버지 성우(星雨)로부터 한학교육을 받았으며, 10여세에 《통감 通鑑》과 사서삼경을 읽고 시문에 뛰어나 신동이라 불렸다.

18세 때에는 할아버지의 소개로 전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의 사저에 드나들며 장서를 섭렵하여 그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신기선의 천거로 성균관에 입학, 관장 이종원(李鍾元)의 총애를 받았다.

한편, 당시 이름높은 유학자로서 성균관교수이던 이남규(李南珪)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김연성(金演性)·변영만(卞榮晩)·이장식(李章植)·유인식(柳寅植) 등과 교유하였다.
2. 독립협회 참여
이무렵에 그는 독립협회운동에 참여하여 소장파로 활약하였다.

22세 때에는 향리 부근인 인차리의 문동학원(文東學院)강사로서 신규식(申圭植) 등과 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 25세 때에는 신규식·신백우(申伯雨) 등과 함께 향리 부근에다 산동학원(山東學院)을 설립, 신교육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26세 되던 1905년 2월에 성균관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장지연(張志淵)의 초청으로 《황성신문》의 기자가 되어 논설을 쓰며 크게 활약하였다.

1905년 11월 《황성신문》이 무기정간되자, 그 이듬해 양기탁(梁起鐸)의 천거로 《대한매일신보》에 초빙, 그뒤 주필이 되어 당당한 시론(時論)을 써서 민중을 계몽하고 정부를 편달하며 항일언론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우리나라 역사관계 사론(史論)을 써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0년 망명할 때까지 《대한매일신보》에 〈일본의 삼대충노(三大忠奴)〉·〈금일 대한국민의 목적지〉·〈서호문답 西湖問答〉·〈영웅과 세계〉·〈학생계의 특색〉·〈한국자치제의 약사〉·〈국가를 멸망케 하는 학부〉·〈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이십세기 신국민〉 등의 논설과 〈독사신론 讀史新論〉·〈수군 제일 위인 이순신전〉·〈동국거걸최도통전 東國巨傑崔都統傳〉·〈동국고대선교고 東國古代仙敎考〉 등 역사관계 논문, 시론 〈천희당시화 天喜堂詩話〉 등을 연재하였다.

《대한협회월보 大韓協會月報》《대한협회회보》에 〈대한의 희망〉·〈역사와 애국심과의 관계〉 등을 발표하였다. 그밖에 역술서 《이태리건국삼걸전 伊太利建國三傑傳》과 〈을지문덕전 乙支文德傳〉을 국한문판으로 발행하기도 하였고, 《가정잡지 家庭雜誌》의 발행에도 관여하였다.

〈독사신론〉은 그뒤 내용의 일부가 가감, 수정되어 최남선(崔南善)이 발행하던 《소년 少年》 제3년 제8권에 〈국사사론 國史私論〉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는데, 이 글에서 이미 그의 단군·부여·고구려 중심의 주체적인 민족주의사관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무렵 그가 집필한 〈동국거걸최도통전〉과 〈이순신전〉·〈을지문덕전〉은 한말의 민족적인 위기를 타개할 영웅의 출현을 대망하면서 썼던 것으로 영웅사관(英雄史觀)을 일정하게 보여주고 있다.
3. 신민회 참여
한말 애국계몽운동에 힘쓰던 그는 28세 무렵, 양기탁·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榮)·이동휘(李東輝)·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이갑(李甲)·이승훈(李昇薰) 등과 더불어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조직에 참여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도 참여, 논설을 통하여 적극 지원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가 30세 되던 해에는 윤치호(尹致昊)·안창호·최광옥(崔光玉)·최남선·박중화(朴重華)·장응진(張膺震) 등과 신민회의 방계조직인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발기, 그 취지서를 집필하였다.

1910년 봄에는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와 안동현(安東縣)을 거쳐 산둥반도(山東半島)칭다오(靑島)에 도착, 신민회 동지들과 함께 청도회의에 참석하고 독립운동을 위하여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윤세복(尹世復)·이동휘·이갑 등과 광복회(光復會)를 조직, 그 부회장으로 활약하는 한편, 《해조신문 海潮新聞》의 후신 《대동공보 大東共報》에도 관여한듯하며, 이해 12월에 창설된 권업회(勸業會)에서 기관지 《권업신문 勸業新聞》을 창간하자 주필로 활약하였다.
4. 교육과 한국사 연구
1913년 북만주 밀산(密山)을 거쳐 상해(上海)로 가서, 동제사(同濟社)에 참여, 활동하는 한편 문일평(文一平)·박은식(朴殷植)·정인보(鄭寅普)·조소앙(趙素昻) 등과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세워 교육에도 힘썼다.

그 이듬해 윤세용(尹世茸)·윤세복 형제의 초청을 받아 만주 봉천성 회인현(奉天城懷仁縣)에 가서 동창학교(東昌學校) 교사로 재직하면서 《조선사》를 집필하기도 하였으며, 백두산 등산, 광개토대왕릉 답사 등 고구려발해의 고적지를 돌아보아 부여·고구려·발해 중심의 한국고대사를 체계화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5. 임시정부 참여
다시 북경(北京)으로 돌아가 한국사의 새로운 체계화를 구상하면서 중편소설 〈꿈하늘 夢天〉을 집필하였는데, 이는 일종의 환상적인 사상소설로서 그의 애국적 항일투쟁의식을 그린 것이다.

1918년경부터 북경의 보타암(普陀庵)에 우거하면서 국사연구를 계속하는 한편, 《북경일보 北京日報》 등에 논설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1919년 북경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 단장이 되었다. 그해 4월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임시의정원의원이 되었으며, 한성정부(漢城政府)에서는 평정관(評定官)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그해 7월 전원위원회(全院委員會) 위원장 겸 의정원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이승만(李承晩)의 노선에 반대, 이를 사임하였으며, 이어 임시정부기관지 《독립신문》에 대립적인 《신대한 新大韓》을 창간, 주필이 되어 적극적인 독립노선을 주창하였다.

특히, 이승만·정한경(鄭翰景) 등의 위임통치청원은 그뒤에도 신채호 등에 의하여 반민족적인 행위로 규탄받았다.
6. 의열단 선언 발표
1922년 의열단장(義烈團長) 김원봉(金元鳳)의 초청을 받아 상해에 가서 그 이듬해초에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으로 불리는 의열단선언을 집필, 발표하였는데, 이 선언에서 그는 폭력에 의한 민중직접혁명을 주장하였다.

이 선언은 일제의 침략과 압제를 경험하면서 성장한 민중세력을 일제의 이족통치(異族統治)로부터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약탈적·불평등적인 제국주의체제를 타파하는 주인공으로 부각시켰다는 의미에서 그의 민족주의이념의 폭과 질의 강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해 1월초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創造派)의 맹장으로 활약하였으나, 개조파(改造派)와의 대립으로 5월 그 회의가 결렬되자 북경으로 돌아와 석등암(石燈庵)에 우거하면서 한국고대사연구에 전념하였다. 이무렵 북경대학 도서관에 출입하면서 이석증(李石曾)·이대교(李大釗)와 교유하게 되었다.
7. 체포 및 순국
1924년경부터 그가 쓴 평론과 논문들이 《동아일보》·《조선일보》 등에 발표되었다. 그의 연보에 의하면, 1925년에 민족독립운동의 방편으로 대만인 임병문(林炳文)의 소개로 무정부주의동방연맹(無政府主義東方聯盟)에 가입하였는데, 1928년에 발표된 〈용과 용의 대격전〉·〈꿈하늘〉 등의 사상소설에서는 자유·평등·폭력·혁명을 예찬하는 무정부주의의 논리가 강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1928년 4월 무정부주의동방연맹대회에 참석하여 활동하는 등 점점 행동투쟁에 나섰던 그는 5월 대만에서 외국위체위조사건(外國爲替僞造事件)의 연루자로 체포되어 대련(大連)으로 이송, 1930년 5월 대련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旅順監獄)으로 이감, 복역하던 중 뇌일혈로 순국하였다.
8. 연구업적
신채호는 한말의 애국계몽운동과 일제하 국권회복운동에 헌신하면서, 그러한 운동 못지않게 한국사연구를 통한 민족운동에 앞장섰다. 한말 《대한매일신보》에 사론을 싣기도 하였고, 《소년》에 〈국사사론〉을 연재하였으며, 최영·이순신·을지문덕 등 국난을 극복한 민족영웅에 관한 전기도 썼다. 이 무렵 그는 역사의 주체를 영웅으로 보는 영웅중심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1910년 해외에 망명한 그는 본격적으로 국사연구에 노력, 1920년대에 이르러 《조선상고사 朝鮮上古史》·《조선상고문화사 朝鮮上古文化史》·《조선사연구초 朝鮮史硏究草》 등 그의 역사연구의 주저(主著)들을 집필하였고, 1930년대에 《동아일보》·《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저서들에 보이는 그의 역사학은, 첫째 사학의 이념이나 방법론에서 중세의 사학을 극복하고 근대적인 사학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둘째 당시 일본 관학자(官學者)들의 조선사연구자세에서 보이는 식민주의적 사학을 극복하는, 민족주의적 사학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며, 셋째 조선혁명선언 이후 역사의 주체를 민중에게서 발견하려는 민중중심사관이 뚜렷이 나타나며, 넷째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으로서 파악하는 한편, 역사연구에 있어서 실증(實證)을 강조하게 되었다.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서의 역사학의 인식은 변증법적 역사발전에 대한 인식으로 보인다. 그는 앞에서 열거한 한국고대사관계의 논문과 저서를 남겼는데, 그러한 논술들은 민족주의이념에 입각하여 독자적인 경지를 내보인 것으로, 과거의 유교주의에 입각한 관학적 역사학과 재야(在野)에서 면면히 이어온 비유교적인 사학을 종합한 데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의 사학은 한국사학사의 여러 흐름들을 종합한 것이다. 그의 한국사기술은 거의 고대사에 국한되고 있는바, 그 특징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단군·부여·고구려 중심으로 상고사를 체계화하였고, 둘째 상고사의 무대를 한반도·만주 중심의 종래의 학설에서 벗어나 중국 동북지역과 요서지방(遼西地方)에까지 확대하고 있으며, 셋째 종래 한반도내에 존재하였다는 한사군(漢四郡)을 반도 밖에 존재하였거나 혹은 전혀 실존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으며, 넷째 상고시대의 조선족과 삼국시대의 백제중국의 산둥반도 등에 진출하였다는 것이며, 다섯째 삼한의 이동설 및 ‘전후 삼한설’을 주장하였고, 여섯째 부여고구려 중심의 역사인식에 따라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적으로 과소평가하는 것 등이라 하겠다.

이러한 그의 역사학은 우리나라의 근대사학 및 민족주의사학의 출발로서 평가되기도 하나, 민족주의사상의 역사연구에의 지나친 투영이 그의 역사이론 및 한국고대사인식을 교조적(敎條的)·독단적으로 이끌어갔다는 점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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